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48. 나를 따르라!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5.31 06:51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2학년 아이들 수련회에 위문 차 다녀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아이들의 레크리에이션을 지켜보는데 사회자가 각 반 반장(요즘은 회장이라고 부른다)을 일으켜 세운다. 강당 자리에 앉아서 행사를 즐기던 아이들 줄마다 그 학급을 대표하는 반장들이 일어섰다. 작년 1학년 1학기 때 지도했던 아이들이다. 어느덧 한 해가 지나 몰라보게 자란 아이들 속에 이제 막 일어선 반장들은 돋보였다.

‘저 아이들이 적게는 28명 혹은 그 이상인 자신의 학급을 대표하는 리더들이구나’ 일어선 아이들에게 외면적으로는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성별도 남녀가 섞여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학급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반장이 일어설 때 그 학급의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응원 속에 전해지는 어떤 기운을,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 학급 공동체일 뿐인 그곳을 이끄는 아이의 어떤 후광을, 그리고 그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온화한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평온함과 인정을, 그래서 리더십은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갖고 싶은 덕목이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을 말이다.

그리고 몇 주가 흘러 주말이었다. 이번에는 전체 학년의 정·부반장이 모두 참석하는 간부 수련회가 열렸다. 주말이었지만 주관 부서 선생님들의 수고로움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겸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앞서 경험한 수련회와는 다른, 리더들만을 모은 자리의 이질감을 느끼곤 다소 당황했다. 학급의 아이들 가운데에선 그리도 빛나던 특별함이 무언가 빛바랜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정·부반장들만을 모아 놓고 보니 기특해도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수련회 때 본 그 리더의 기운은 잘 전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낀 나는 곧이어 리더십을 이루는 한 부분이 거기에 없음을 알고 그 허전함의 이유를 눈치챘다. 그건 리더십이 그 자체만으로는 자생적으로 발현할 수 없는 집단적 인정의 발로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었다. 진정한 리더는 스스로 빛날 수 없다. 이는 그가 속하고 이끄는 집단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리더십은 그것이 철저하게 타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덕목이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탐낼만한 역량이다.

요즘 알고리즘에 이끌려 무한도전 동영상을 많이 보게 된다. 무료한 감정에 웃음을 불러오려면 이만한 게 없다. 그 중 ‘무한도전 웃음 참기’를 검색해 보길 권한다. 우리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억지로 누를 때 그 감정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출연진들이 웃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모습은 또 다른 강렬한 웃음을 부른다. 종방한 지 벌써 6년이 넘었지만, 원초적 웃음이 주는 즐거움은 다른 영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건 출연진들을 리드하는 개그맨 유재석 씨의 능력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거나 많은 출연진을 가리지 않고 그는 때때로 낮은 위치에 처한다. 심지어 중앙에서 진행하다가 뒤로 밀려날 때도 흔하다. 한때 경청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의 상징처럼 여겨진 그의 진행 방식이다. 그러나 요즘 영상을 통해 다시 살펴보는 그의 리더십은 일방적인 수용 이상의 카리스마였다. 출연진들의 말이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진행의 맥을 잡고 있었으며 그런 흐름을 망가뜨리는 발언들에는 때론 위트로, 때론 무심함이나 본인의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여유를 보인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노련한 지휘자를 연상케 했다. 적어도 방송에서만큼은 그가 훌륭한 리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를 보면서 리더의 덕목 중 하나는 조직의 모든 사람과 거리낌이 없는 사이여야 한다는 걸 느낀다. 한 에피소드에서 출연진들이 몇 개의 텐트로 나뉘어져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있었다. 의외로 서로 친한 줄 알았던 출연진들은 자신이 편치 못한 동료와 한 텐트에 들어간 후에는 어색해하고 서먹한 경우를 보였다. 반면 유재석 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프로그램의 모든 출연진과 거리를 두지 않는 친밀함을 보였다. 비록 타인이 그렇지 않게 느낄지라도 그런 불편함을 뛰어넘는 감정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포용적이고 수용적인 온화한 리더처럼 보이지만 의식과 감정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의 친구 모임에서도 누가 리더인지 알려면 모임 구성원에게 두루 거침이 없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비록 구성원 중 일부는 그에게 서먹함이 있더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리더일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 모임은 리더가 없을 수 있다.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한 리더는 당장 들통이 난다. 그래서 리더십처럼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덕목은 없다고 본다.

나이가 들며 어쩔 수 없이 리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처럼 연공서열의 위계 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피하기 어려운 시기가 엄습한다. 학교 공동체는 일반 직장과 달라서 평교사들 가운데 부장 교사의 직을 부여할 때 특별한 경쟁 과정이나 심사를 겪지 않는다. 그냥 그 해, 그 학교의 여건에 따라 부서의 장을 뽑고 한 해 살림을 꾸린다. 때론 교장·교감 선생님의 부탁이나 권고로, 혹은 승진을 위한 가산점 획들을 위한 필요로, 그도 아니면 자연스러운 연차로 부장 교사가 결정된다. 그래서 누구든 ‘제가 해 보겠습니다!’라고 선언하면 높은 확률로 맡을 수 있는 자리다. 최근엔 부장 교사를 하고자 하는 이가 별로 없어서 더욱 되기 쉬운 역할이기도 하다. 선생님들이 부장 업무에 부담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일이 엄청나진 않더라도 한 부서의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는 압박감이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처음 부장 교사를 맡은 선생님들은 적잖이 그런 부담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극복된다.

리더십을 직관적으로 떠올릴 때는 상황이 극도로 혼란할 경우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흔히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일상에서나 업무 중이나 난관에 부딪힐 때, 우리는 ‘어쩌지’라는 두려움과 함께 이를 해결할 어떤 ‘사람’을 찾게 된다. 그 ‘사람’은 자연스레 직급이 높은 사람일 경우가 많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이른바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가진 사람은 그의 언행, 태도, 비전, 호소, 의지 등을 통해 미처 아직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을 이끌게 된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래서 그 사람의 등 뒤를 바라볼 때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곧 리더가 된다.

나는 좋은 리더가 아니었다. 어렵고 곤란할 때 고개를 돌려 그 상황을 타개할 어떤 사람을 찾은 적이 많았다. 이젠 그러면 안 되지! 라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버텼지만, 빌려 입은 옷처럼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주 받았다. 2학년 부장으로 시작한 첫 부장 교사 때는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들과 어떤 의사 결정을 내려야 했던 회의의 전날 밤, 잠을 못 이루고 쓰린 속을 부여잡은 채 마루를 뒹굴었다. 의연한 척하려 해도 내면의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었다. 겉으론 화목한 부서를 꾸리고 있다고 둘러댔지만 담임 선생님들의 요구 사항을 잘 처리하지 못 할 때는 자책한 적이 많았고, 무언가 곤란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빠른 대처를 못할 때는 무능한 리더임을 자각한 적이 잦았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단위 학교 조직의 ‘장(長)’은 맡을 순 없겠구나 싶었다. 그렇기에 교장·교감 선생님 같은 책임 있는 위치의 분들에 대해선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 물론 존경받지 못하는 교장 선생님도 계시지만 관료 조직의 한 정점에 위치하는 무게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불만은 아래 사람에겐 편한 영역이다. 따라서 늘 쉬운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꼬우면 니가 하면 되잖아!’라는 답변이다. 그 반발에 쉽게 대응할 수 없다면 시답잖은 불평은 의미가 없다.

불판에 고기를 구울 때 꼭 집게를 잡고 직접 구워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모습은 테이블에 앉은 모임을 말 그대로 ‘핸들링’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집게를 잡았다고, 고기를 굽는 것만으로 그 의지가 존중될 순 없다. 결국엔 고기를 잘 구워야 한다. 그래야 집게는 그다음에도 허락된다. 집안에서는 흔히 어른이 집게를 잡는다. 리더십이 수많은 덕목 중 멋있어 보이고 갖고 싶은 것인 이유는 기댈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어깨를 내줄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리더십을 갖는다는 건 어른의 모습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어른이 되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살면서 들은 수많은 경구들 중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맞는 말은 흔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때, 사람을 만들게 하는 자리가 과연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비롯된 자리인지는 쉽게 무시되는 것 같다. 수련회에서 반장들이 보여준 리더로서의 느낌은 그 자리의 토대가 되는, 그 자리를 만들어 준 학급의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간부 수련회에서 받은 허전한 리더의 기운은 사람을 만드는 자리를 이루어 줄 동료와 공동체가 없는 가운데 받은 느낌이었다. 온전한 리더라면 그를 만들어준 자리가 어떤 것인지 반드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리의 의미를 모르는 부족한 리더가 판치는 시기이기에 그런 생각은 더욱 요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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