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娛樂歌樂 시 읽기】 18. 김용택, ‘섬진강 1’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4.20 06:46 | 최종 수정 2024.04.20 20:16 의견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시집 <섬진강, 창작과 비평, 1985>에서

시를 쓰고 읽는다면 그 누구라도 모를 리 없는 김용택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이다. 이 시로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문단에 나왔고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 시인이 되었다. 강은, 섬진강은 그의 삶의 근원이 되었고, 그의 정신이 되었다. 섬진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물줄기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프고 고된 애환을 그린 시인이 되었다.

강마을 사람은 강물 소리를 들으며 산다. 물이 노래하는 소리와 우는 소리를 들을 줄 안다. 가뭄과 홍수에 지르는 비명을 구분할 수 있고, 평상시에는 유유자적 흐르는 물의 평안을 즐길 줄 안다. 봄의 물소리는 부드럽고 여름의 강물은 마치 코를 골며 자는 사내만큼 거칠다. 가을의 강물은 단풍 한 잎 물길에 실어 나를 만큼 운치가 있는가 하면, 겨울 강은 고요하지만 성마르며 때로는 유빙流氷으로 시절을 거스르기도 하지만, 다시 봄이 되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강은 쩡 쩡 쩡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시인 김용택이 섬진강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면 나는 내가 몸 기대어 사는 임진강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임진강은 한반도의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역사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불행히도 남북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남북갈등의 최전방으로 남북 최고위층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지역이다. 그들의 기침과 잔소리에 이곳 사람들은 몸살을 앓고 산다. 남북 정치의 핵심인 이 지역은 불행 중 다행으로 생태계의 보고로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강들이 잘리고 막히며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다행히 임진강은 여기를 모천母川으로 삼아 회귀하는 황복을 비롯한 물고기들과 재두루미를 비롯한 새들이 있고 이 생명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임진강의 어부와 농부와 그의 식구들과 벗들이 살고 있다. 임진강은 그들의 몸과 정신을 구성하는 질료이고 그들이 일하고 먹고 사랑하며 사는 아비투스이며 몸과 영혼의 고향이다. 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물의 바탕으로 사는 뭇 생명의 요람이며, 강가의 충적토에 땅을 이루고 그 땅에 기대어 살면서 울고 불며 사랑하고 싸워서 가꿔 온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임진강 물소리를 통해서 나의 혼과 뼈와 살이 되었던 금강의 물소리를 새기고, 아버지의 유년에 배였던 예성강 물소리를 마음속에 담아 두려고 한다.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의 장엄하고 가파른 물살을 상상하고, 북녘은 물론 유라시아로 뻗어가는 민족의 미래를 그려 보려고 한다. 시인 신동엽과 조재훈과 나태주가 금강을 찬미한 것처럼, 시인 신경림이 북한강을 시화하고 시인 김용택이 섬진강을 노래한 것처럼, 임진강 물줄기가 지나가는 마을에 누옥을 짓고 나는 임진강을 지키고 사랑하며 내 속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꺼내 임진강과 생명, 민족의 평화와 통일과 번영을 노래하며 살고자 한다.

물은 흘러야 한다

낮은 곳으로 스며 가난한 땅을 축이고

굽이굽이 구석구석 반도를 적시어

바다에서 만나 한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

흐르고 싶어도

여기 흐를 수 없는 강이 있다

알을 밴 연어 떼처럼 온몸으로

거슬러 올라야 사는 강물이 있다

시간의 역류逆流를 타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만나야 하고

시간은 앞으로 나가야 하나

만날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이

분단과 경계와 금지에 맞서

홀로 물방울로 멈춘 사람들이

강가에서 살고 있다

주문呪文의 시간에서 풀려날 수 없어

세월의 허리를 붙잡고

건널 수 없는 나루터에서

하릴없이 우는 사람들이 있다

우는 사람들 곁에서

우두커니 서서 함께 우는 강물이 있다

이념을 걷어내고 거슬러 올라

모두 제 갈 길로 가야 하거늘

흐를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강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눈물을 따라

임진강은 오늘도 목놓아 울고 있다

- 졸시 ‘거꾸로 흐르는 물-임진강 1’

(전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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