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는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수락 연설 마지막 부분이다. 그의 외침은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의 속성을 관통한다. 마치 마태복음에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수많은 기독교의 교리 중에 이처럼 쉽고 명쾌한 실천 덕목이 또 어디 있을까? 결국 좋은 세상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그러나 과연 오늘날 착한 사람이 이길 수 있을까? 착한 행동이 복잡한 인간의 삶에 하나의 올바른 지표로 가당키나 한 걸까?
나는 진로 교사로 전과(轉科)하기 전에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래서 교직을 시작할 때부터 다른 교과 선생님보다는 착하게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은 비록 도덕·윤리 교사가 아니지만 착하게 산다는 것, 선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학교에서조차 강조하는 게 어색하고 억지스럽다. 일단 ‘착하다.’는 말을 쓴지가 언제인가 싶다. ‘착한 행동을 해야지!’라는 주장도 기억이 안 난다.
그 빈자리엔 어느샌가 보상을 바라는 실리로서의 선행이 들어서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가르쳤던 결과적 행복이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해야지 훗날 이렇게 되지 않겠니~’와 같은 타이름이 그렇다. 네가 한 행동이 너와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이익(利)이 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정도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도덕 기준이다. 오랜만에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거나 ‘너 자신과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인간은 도덕적이기에 짐승과 다르다는 맹자의 가르침부터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내 안에서 빛나는 도덕 법칙이 경이롭다고 한 칸트의 말은 우리가 애초에 선함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고 선한 행위에는 조건을 따질 수 없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존엄해질 수 있는 근거를 알려주었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도 이 점이 맘에 들고 멋있었다. 육체와 물질의 이익을 넘어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당장 손해를 감수하고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데 도움을 준 밀(J.S.Mill)의 질적 공리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멋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착함과 선함을 강조하기에 세상도, 우리 아이들도 녹록지 않다.
일단 보고 배우는 게 영항을 많이 줬다고 본다. 그간 착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면면이 어떻게 포장되어 왔는가를 알게 되었고, 뉴스들이 미담보다는 숱한 사건·사고들을 연일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전 지구적으로 지도층이나 유력 계층들이 취하는 천박한 삶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측면이 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뭔가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다. 그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생각으로 대우받는다. 더 이상 상황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이 험하고 혼란스러울수록 학교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착한 삶, 선한 행동에 관한 가치를 재정립할 곳으로 그래도 학교가 가장 선두에 서야 한다고 본다. 이곳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도덕·윤리 교사였던 시절부터 진로 교사로 이어지며 마음에 품었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성찰을 다루는 측면에서 두 과목은 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과목을 바꾸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하여 진로 교사가 된 지금도 아이들이 착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방편으로서 진로를 가르치고 싶다. 그럼 어떻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보고 배우는 게 문제이므로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오래된 이론이지만 반두라(A.Bandura)에 의해서 널리 알려진 ‘보보인형 실험’과 그것을 통한 관찰학습, 즉 모델링을 들 수 있다. 선한 행동이 불러올 선한 영향력. 아이들에게 착한 행동을 보여주고, 따뜻하고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착한 행동의 사례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해법이라고 본다. 일례로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만다라트를 만들어 실천에 옮긴 오타니 쇼헤이의 경우를 든다. 그가 철저한 계획 속에 실시한 연습 외에 자신의 운을 좋게 만들기 위해 한 선행의 모습이 많이 회자 된다. 그러나 거기엔 좋은 운을 만들기 위해라는 조건이 붙어 아쉽다. 더 좋은 사례는 그의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한 해 85억엔(약 809억)이 넘는 오타니의 수입을 관리하는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며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는 데도 일체 아들의 돈에 손을 대지 않고 검소한 삶을 살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아들의 성공을 금전적으로 보상받고 싶지 않은 부모의 성숙한 모습이 귀감이 된다.
한 분 더 예를 든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이웃을 위해 봉사한 삶을 산 성산 장기려 선생 같은 분의 삶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두고 내려와 평생 홀로 병원 옥탑방에서 살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행하고, 여러 사회복지 사업을 주도하여 그들의 자립을 도왔으며, 이산가족 상봉 등의 기회에도 일체의 특권을 거부한 선생의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착한 삶의 숭고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치료비를 못 낸 가난한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준 일화도 좋은 예이다. 착한 삶을 산 사람들이 후대에 어떤 존경을 받는지, 또한 그분들의 삶을 접하며 약간의 경외심을 갖는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느낌인지 아이들에게 꾸준히 알려주는 것이 이 혼탁한 시대에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제발 무언가 실수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들도 보여주고 싶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는 게 특히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라고 확신한다. 애초에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반성 없는 성찰은 결코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강조하고 싶다.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