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2024년 현재 대한 축구 협회는 새로운 국가대표 감독으로 홍명보 울산 HD 감독을 선임했다. 선임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로 연일 떠들썩한 비난과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축구 협회는 그냥 밀고 가자는 입장이다. 홍 감독도 본인이 해온 말들과 다른 행동으로 인해 함께 비난을 받고 있다. 홍명보 감독, 아니 감독이기 이전에 한국 축구에 전무후무한 레전드. 스위퍼라는 최종 수비수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중원을 누비며 때론 과감한 공격으로 멋진 득점까지 했던 ‘영원한 리베로’. 그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는 나의 고교 동문 선배이다.
나는 축구 명문 고교를 나왔다. 유의할 사항은 학교의 축구 실력이 동문의 실력과 무조건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난 축구를 포함한 모든 운동에 젬병이다. 지금은 잊힌 이름들이지만 전설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전 국가대표 감독), 김삼락(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감독), 그리고 김은중(전 U-20 국가대표 감독) 선수들이 우리학교 출신이다. 가장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는 1학년 때 중퇴하고 독일로 건너간 손흥민 선수가 있다. 그렇다. 손흥민이 내 고등학교 후배라니! 이 정도면 축구 분야에서 우리 학교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설명했다고 본다.
운동부가 있는 학교에 다니는 건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질 수 있어서 긍정적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학교가 전국대회 8강 이상에 오르면 당시 효창운동장으로 수업을 전폐하고 선생님들과 응원하러 갔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비록 인조 잔디 구장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파란 축구장의 강한 여운이다. 그 위에서 우리 학교 선수들이 골이라도 넣을 때면 친구들과 얼싸안고 흥분했던 기억과 스크럼을 짜고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은 소중한 추억이다.
한 학기 성적이 나오고 학기말 상담을 하니 공부 외의 길을 택하려는 아이들의 고민이 많다. 운동이나 노래, 또는 그림 등 이른바 예체능 계열로의 진로를 희망하는 아이들의 공통된 고민은 해당 분야의 진로가 주는 불안감과 이를 공유하는 부모님의 반대다. 나는 상담을 통해 아이의 꿈이 확고한지 재확인 시켜주고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이유를 한 번 더 객관화해서 아이의 선택지에 포함시킨다. 내가 부모님이 아니기에 무리한 응원이나 설득을 할 수 없다. 아이 스스로 현실을 인식하기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나눌 뿐이다.
예체능은 공부보다는 ‘평균의 함정’이 심한 분야이다. 일전에 프로야구 구단 선수들의 평균 연봉을 조사했을 때도 느낀 바 있지만 실력과 인기를 독점한 소수가 누리는 영광에 비해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의 몫이 너무 적어서 생활인으로서의 진로로는 강한 추천이 어려운 게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특히 진로 상담에서 이른바 ‘노력주의’를 강요할 수 없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나는 아직도 이 분야에서 ‘노오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나 같은 범부도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악기를 연주하면, 농구를 하면, 초상화를 그리면, 그게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바로 느낄 수 있다. 반면 공부의 세계는 다르다. 그곳은 이게 안 되면 저것, 이 역량이 안 되면 저 역량, 또는 복합 역량으로서 비빌 데가 많다. 예술과 운동의 세계는, 물론 고차원에 이르면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순 있어도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실력 차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분야다. 그래서 ‘노력주의’를 넘어서는 ‘노력 신화’는 소질과 적성이 갖춰진 사람들에게만 신중히 주문해야 할 응원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과도 이 점을 공유한다. 우리 학교엔 100명 이상의 단원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다. 악기를 전공하려는 아이에게 묻는다. 단원들 중에 악보 이해가 빠르고, 같은 시기에 연습했는데 유독 진도가 빠른 아이가 있다면 자신이 거기에 해당하느냐고, 가혹할 수 있기에 최대한 사려 깊게 묻는다. 상담실은 꿈과 현실을 모두 취급해야 하는 공간이기에 그렇다.
해외 축구의 아버지, 즉 ‘해버지’로 불리는 박지성 선수의 일화를 떠올린다. 우리는 그가 왜소한 체격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간신히 명지대에 들어갔고 당시 올림픽 대표팀 허정무 감독과 명지대 감독의 친분으로 성사된 연습 경기에서 놀라운 드리블과 골을 통해 운 좋게 대표팀에 입성한 줄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주목받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라고 미화해 왔다. 사실보다 무서운 게 ‘왜곡된 신화’다. 나는 박지성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가 레전드 차범근 선수로부터 상을 받은 어린 시절 사진을 기억한다. 일명 ‘차범근 축구상’은 당시 한 해 동안 훌륭한 활약을 한 초등학교 축구 선수 6명에게 부여한 상이다. 그 상의 1992년 수상자 중 한 명이 박지성이었다. ‘차범근 축구상’으로 향후 스타가 된 선수는 이동국, 최태욱, 기성용, 황희찬, 이승우 등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선수들이다. 박지성 역시 이미 떡잎부터 달랐던 선수였던 것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의 안용중학교를 나왔는데(이 학교는 차범근의 모교이기도 함) 당시로서는 별 볼 일 없던 팀이 그가 활동하던 시절 도내 상위권 팀으로 도약한다. 문제는 왜소한 체격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수원 공고 시절이었다. 실력의 정체기였을까, 프로팀 선발에서는 당시 워낙 리그의 최고 구단인 수원 삼성에 도전했기에 좌절하였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명지대학교에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다. 연습 경기 한 번으로 그를 무려 올림픽 대표 선수로 발탁한 허정무 감독의 안목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대표팀 소집에서 직감에만 의존한 선수 선발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눈에 확 들어온 플레이가 계기가 되었을지언정 평소에 갖춘 실력이 없는 선수였다면 발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은 신화가 비집고 들어오기 딱 좋은 틈새다.
박지성 선수의 올림픽 대표팀 시절은 보통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2002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크게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발탁한 히딩크 감독의 안목 또한 칭송되어 왔다. 그러나 히딩크가 그를 발탁하기 전인 올림픽 대표팀 활동 후 그를 택한 구단은 일본 J리그의 ‘교토 퍼플 상가’였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당시 그가 받았던 연봉이 국내 선수 최고 연봉인 최용수 선수의 2억 1천만 원(부산일보, 1999.3.30.)을 넘는 약 5천만 엔(4억 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프로 입단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던 선수다. 그리고 교토 퍼플 상가는 그의 활약으로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우승하게 된다.
나는 박지성 선수가 훌륭한 감독들의 눈에 들고 열심히 노력하여 그 자리에까지 갔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별 재능이 없던 사람이 노력과 운만으로 성공한 것처럼 말하는 건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예체능 분야에서 오직 노력만으로 강요된 비슷한 성공 신화들은 교육적으로도 좋지 못하다고 본다. 그건 공부를 못해서 예체능을 하는 게 아니라 예체능을 주로 하면서는 도저히 힘들어서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 우리의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등교할 준비를 마치고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본 스포츠 뉴스에서 우리 반 친구 문해식(가명)이가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나가 골을 넣는 장면을 본 후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열여덟의 나이에 이미 태극마크를 단 우리 반 친구의 그 이후 선수 생활을 그러나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 프로 구단 성남 일화에서 후보 선수로 활약한 장면을 TV로 한 두 번 보았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은 선수라도 우리가 아는 유명한 선수가 되는 길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나는 그 친구가 축구 선수로서의 삶이 잘 풀리지 않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라도 잘 살아왔기를 희망한다.
전설의 브라질 축구 대표 선수였던 소크라테스가 전직 의사였고, 은퇴 후에도 의사 생활을 했다는 일화와, 일본 축구의 대스타 나카타 선수가 은퇴 후 사케 회사의 대표가 됐다는 일화, 그리고 지난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때, 마치 동네 사회인 야구팀처럼 소방관, 지리 교사, 재무 분석가, 부동산 중개업자 등 다양한 직업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화제를 몰았던 체코 야구 대표팀처럼 예체능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함께 하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네 교육 환경에서 예체능 분야의 좀 더 유연하고 열린 변화를 희망한다. 예체능 분야의 상담을 하면서 다른 분야 역시 소질과 적성을 무시할 순 없다는 점을 재차 느끼며 박지성 선수가 은퇴 후 남긴 말을 전한다.
“좋은 감독이 되려면 전술도 중요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상황을 즉시 파악해서 선수들의 의욕을 끌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호통으로 선수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분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히딩크 감독이나 퍼거슨 감독처럼 할 수 없다. 나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 훌륭한 축구 행정가로서 아시아 축구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축구를 잘했다고 축구 감독 역시 잘할 것이라 믿는 것 또한 무리한 욕심일 수 있다. 그는 그런 욕심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현재 전북 현대모터스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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