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경덕
흔히 황진이와 박연폭포와 함께 화담 서경덕을 '송도삼절'이라 부릅니다 당시 개성의 3대 자랑거리라는 얘깁니다 뭐 황진이야 뜨르르하게 알아주는 시 잘쓰는 기생으로 유명하고 박연폭포는 그 주위 경관이 웅장하다니 그렇다고 하고, 대체 서경덕은 그 무엇으로 개성이라는 큰도시의 자랑거리가 되고 조선의 명사라는 셀럽이 되었으며, 청나라의 <사고전서>에 그의 글이 실리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는지...아무튼 서경덕이 간단한 인물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 나는 조선(철)학의 내재적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으니 어찌해서 그가 조선(철)학의 또 다른 기원이 될만한지 보것습니다 서경덕의 시문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독서유감'이 있습니다 뭐 '책을 읽으며...' 정도의 시입니다.
"글을 읽을 때는 큰 뜻을 품었었는데,
늘그막에는 안빈낙도도 달게 받아진다.
부귀를 얻으려먼 다툼이 심하므로 손대기 어렵고,
자연 속에 몸을 맡기니 마음이 편하다.
나물 캐고 고기 낚아서 배를 채우고,
달을 읊고 바람을 쐬면서 정신을 씻어본다.
학문의 이치를 깨달아 즐겁기만 하니,
어찌 이 인생이 헛되것는가?"
보다시피 자연 속에 거닐며 청빈한 삶 속에서도 자족하는 처사의 안빈낙도를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흔히 말하는 달관의 경지가 느껴지는 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잘 드러낸 싯구가 '학문의 이치를 깨달아'라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뭔지 알아보아야 하것지만 서경덕의 이름은 분명코 여기, 남다른 학문의 성취에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론 우리는 "부귀를 얻으려먼 다툼이 심하므로 손대기 어렵고"라는 대목을 통해 서경덕의 자연취를 엿보게 하는 처사적 태도가 사실은 조선 중기, 중종 명종 당시의 심각한 당쟁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경덕이 서경덕이 된 이유는 단순히 당쟁이라는 치열한 생사의 이권 다툼의, 명리의 세계를 떠나 있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현실정치를 넘어 조선 성리학의 단계가 어떠한지를 훌륭하게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경덕이 남긴 유작을 통해 그가 깨달은 학문의 이치를 고구해 볼 수 있는데,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것입니다.
서양에도 ‘혼돈’이니 ‘태초’라는 말이 있거니와, 동양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말로 ‘태허’니 ‘태극’이니 ‘무’니 하는 개념지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변화를 일으켜 ‘음양’으로, ‘이기’로 분화하고 ‘오행’으로, 다시 ‘만물’로 화생한다는 것이 <주역>에 기반을 둔 동양적 자연관의 기본틀입니다 중요한 것은 태허, 태극에서 분화하여 음양이 생기게 하는 근본이 이理(정신)냐 기氣(물질)냐 하먼서 마치 서구철학에서 ‘이데아’냐 ‘실체’냐 하고 크게 갈라져 서구철학사의 근본줄기가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동양의 철학사 또한 오랫동안 理 중심이냐 氣 중심하먼서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 학파가 갈리고 분당이 생기고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는 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하나의 철학의 뿌리로서 형이상학이 늘 제일의 자리를 차지해왔던 바 그대로, 동양의 철학사에서도 최익한(<실학파와 정다산>, 서해문집)의 말대로 오직 이만이 중요하다는 유리론이 일종의 '순수이성'철학이자 지배철학으로 유학계를 독차지하먼서 크게 기염을 토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 유리론적 성리철학 앞에서는 문학, 예술, 기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등 민생문제를 취급하는 학문까지도 모두 긴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관념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에 대한 왕자적 지위를 점령하여서는 저 서양 중세의 신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꼭 그처럼 동양의 성리학(理氣哲學) 또한 신성불가침의 고귀한 학문으로 행세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이를 불변의 도덕법칙으로 해석함으로써 이것이 백성들에게 충과 효와 명분이 중요하다는 맨데이터리한 당위ought to의 모럴로서의 강제논리이자 지배철학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입니다 뭐 이중심의 유리론은 '변화'를 부정하는 지배이데올로기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변화를 부정하는 유리론이 중심인 사회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모하고 저 '북벌론'처럼 헛된 명분에 고착되기도 하는 등 사회는 점차 고질에 걸린 중환자처럼 피폐해져 갔던 것이고, 이런 와중에 권력의 맛을 본 탐리들은 백성들의 등가죽을 벗기는데만 혈안이 되었던 것이니 조선이 망하게 된 근본적 까닭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의 형이상학에, 관념론에, 유리론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리론 천하에서도 서경덕은 조선 최초로 이런 조선의 관념론으로서의 유리론에 대항하여 변화를 중시하는 오늘의 유물론으로서의 유기론을 주창하였으니 서경덕의 중요성은 실로 여기에 있던 것입니다 그는 이기의 근원을 논하는 '원이기原理氣'에서 말했습니다.
"밖이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작이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텅 빈 것이 곧 기다 텅빈 것은 끝이 없으니 기 또한 끝이 없다 기의 근원은 그 처음이 하나다 이미 기라고 하먼 하나는 곧 둘을 품고 있으며 태허도 하나이므로 그 가운데 둘을 품고 있다 이미 둘이 되먼 열림과 닫힘, 움직임과 멈춤, 만들어냄과 극복함이 없을 수가 없다 능히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며, 능히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능히 낳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까닭의 근원을 밝혀 태극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 밖에 리가 없으니 리는 기를 주재한다"
그는 이렇게 사물의 존재법칙과 도덕법칙에 목마른 이들에게 이와 기라는 성리학 이론을 도구로 우주 질서의 근본 이치를 해명하고 있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모든 사물과 인간의 존재와 도덕법칙의 중심으로 기를 설정하였던 것이니, 그는 뭐 저 영국의 사제인 둔스 스코투스가 로마가톨릭의 스콜라철학에 맞서 영국 최초로 유물론의 최초의 형태로서의 유명론의 선구자였던 것처럼, 꼭 그처럼 중국 성리학의 한국적 토착화의 선구자이자 조선 최초의 유명론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남긴 사상을 정리한 <화담집>을 보먼, 앞에서 본바 있는 시, 부와 같은 문학적인 글과 문우들과 주고받은 편지, 남에게 써 준 묘비명, 그 사람의 일생을 정리한 연보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담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글의 형식은 대부분 '잡저雜著'에 담겨 있습니다 즉, 서경덕의 철학을 잘 드러내는 '원이기'를 비롯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복기견천지지심설' 등 중요한 철학적 유산이 모두 '잡저'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 '잡저'라는 것은 표현상으로만 보먼 잡다한 글이라는 뜻처럼 읽혀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문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경덕의 사상의 요체는 모두 '잡저'에 담겨 있습니다.
자,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이것은 오늘 '에세이'라 칭하는 자유롭게 쓴 비판적인 성격을 지닌 산문풍의 글이 당시에는 지배적 형식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하나의 지배적 형식으로 시경체를 비롯한 한시와 시조 등 오늘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정시'가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지배적인dominant 위치를 누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 진실을 알리고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묘사단계로서의 서정시의 모방문학으로서는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먼 묘사에, 모방에 기초하고 있는 시가 가리키는 것은 지배체제의 온존에 그 주요 목적이 있는 것이니만큼, 시는 결과적으로 구심적이고 전체적인 동일성의 문학으로 지배권력을 싸고 돌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이 산문을 위험하다고 보고 적의를 드러내고 사갈시한 이유는 산문으로 대표되는 이야기들은 근본적으로 비판적이고 균열적인 차이에 기초한 저항담론에 기초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찌질한 이야기라는 뜻을 다은 ‘소설小說’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며, ‘패관소품稗官小品’ 또는 ‘패관소설稗官小說’이라는 말도 돌피 같이 쓸데없는 하찮은 이야기라는 인식이 반영된 개념으로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보아왔듯이 원효의 '논論'과 '소疏'가 바로 이런 이야기의 일종이고 삼국'유사遺事'가 주로 설화說話라는 최초의 이야기 형태를 보였으며 김시습의 '신화新話' 또한 그런 의미에서의 소설과 유사한 말로서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제현의 역옹'패설稗說'과 이규보의 백운'소설小說' 오늘 이야기한 서경덕의 '잡저雜著'는 무론 조선 중후기의 반계'수록隨錄', 허균의 홍길동'전傳', 성호'사설僿說', 연암'일기日記' 등 소품문小品文 성격을 지닌 오늘 에세이라는 문학적 형식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조선적 서사체로서의 한국형 서사 문학 전통으로 도저하게 흐르고 흘러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가 구심적이고 전체적인 동일성의 지배 문학에 가까운 형식이라먼 하나의 비판적 성격을 지닌 이야기로서 산문은 원심적이고 개인적이며 차이를 지닌 탈중심의 저항문학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먼 이들이 어찌해서 저항문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형식 속에 담긴 철학적 본질이 무엇인지...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한국학으로서의 조선학을 염두한다고 볼 때 대단히 중요한 학문적 의의가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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