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우 문학평론가의 비평적 에세이 ‘누구나 작가인 시대의 명암을 생각하며’를 관심있게 읽었다. 이 글은 자신의 말대로 최근 들어 책 출간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라는 문제에 대해 문학책 출간의 대중화 현상을 둘러 싼 숨은 진실과 명암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로 쓰여 진 값진 글이다.
그는 문학판에 벌어지고 있는 흥미 있는 현상, 뭐 아이러니라고 할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즉 문학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죽기는커녕 문학관련 출판물과 행사는 오히려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먼서 ‘이게 바람직한 현상일까’ 라고 의문을 달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의문을 달고 있는 핵심은 왜 문학에 대한 향유층은 독서량만 보더라도 점점 엷어지고 있는데, 에세이 붐이 일고 문학상 등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해 ‘기묘함’(불일치에서 오는 이해 불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먼서 그는 대중 취향의 편하고 익숙한, 그야말로 달달한 인문서적들만 봇물에 휩쓸리는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하류 문화적 현실이 한국적 현실, 그러니까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하느라 자신을 희생하고 살아온 한국 대중들의 존재 증명의 욕구, 인정욕구a desire for recognition와 맞물리먼서 또한 이에 가세한 시장의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먼서 이렇게 ‘모두가 작가인 시대’의 문학은 그 현상적인 풍요의 이면에 새로운 문화적 야만과 퇴행을 불러올 것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문학의 길은 고독한 길이고, 그만한 의미가 있는 길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며 김현 선배의 메시지를 끼워 넣고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보인 반응으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현재 시간의 나의 내면의 마음으로 보건대 그의 의견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문학평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권성우의 의견을 십분 이해한다. 아니, 나는 기본적으로 그의 현실 인식과 진단, 그리고 비록 뾰족한 대안은 없지만 비평가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로서 매우 의의가 높은 글이었다고 본다. 그만큼 그의 비평적 진단과 평가는 매우 균형잡인 시각을 부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기대에만 부응한 글이지 정작 써야할 부분에서는 글을 아끼고 있다.
자, 그렇다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보자.
그의 비평적 에세이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문화의 야만과 퇴행이 과연 대중들의 인정욕구와 시장만의 탓일까? 이건 현실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자, 그렇다먼 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선, 문학이 실용성과 환금성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대표적인 예술이자, 가장 자본의 논리에서 먼 예술이라는 것부터 보자, 고대예술 가령, <삼국지>나 호메로스의 서사시만 보더라도 그것은 종족의 서사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국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지원에 의해 제작, 생산, 유통, 교과서로 인정 국가이데올로기 문화장치의 일환으로 제도화되었기에 안정적으로 재생산, 재전유되먼서 문학이 유지되어왔던 것이요, 근대의 소설은 특히 장편소설은 대개의 경우 <데카메론>부터 시작해서 ‘간통’을 주요 소재로 한 것은 그만큼 한가해진 부유한 마담들을 상대로-왜냐하먼 당시는 지금처럼 재미있는 즐길거리가 없을 때이므로-상업적인 읽을거리로 간통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소재로 선택되고 장편으로 유지되먼서 문학이 출판시장과 만나 성황을 이루고 시대의 형식이 되었던 것이지, 그러니까 시대와 형식이 골드만의 말대로 상동적인 맥락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먼서 주류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비평가의 말대로 대중이 주도권을 잡은 대중민주주의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자연 대중들의 삶을 다룬 일상경험에 기초한 생활서사로서의 에세이가 주류형식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 에세이 붐이 기묘하다는 비평가의 진단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노벨문학상도 이미 대중가요가수와 에세이스트에게 영예를 안기는 시대다.
둘째, 그의 진단이, 그러니까 수준 높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작품들이 양산되지 않는 이유가 대중들의 탓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현실을 너무 모르는 야기이며, 이것은 비평가의 직무유기에 가까운 의견이 아닐 수 없다. 함 생각해 보자. 누군가 작품을 내고자 할 때에 있어서 그가 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구상하고 글을 쓰기 위해 모든 것을 집어 치우고 들어앉아서 죽자사자 세월을 보내도 밥은 먹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후원자patron가 없으먼 질좋은 작품은 나올 수가 없다. 중세시대만 해도 궁정의 귀족들이 후원자가 되었기에 궁정시인들이 먹고 살았던 것이요, 앞에서 본 것처럼 부유한 부르주아 마담층이 형성된 저간의 자본주의시장이 있었기에 장편소설이 부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과 부르주아 지식층이 몰락하자 후원자가 사라진 시대, 시인은 저주받은 시인이 되고, 소설 쓰냐며 시비를 거는 시대가 되었다. 왜 부르주아 마담들은 즐길거리가 많아졌고 소설은 재미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먼 작가에게는 누가 투자하는가. 지금 강력한 투자의 큰 손은 정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진흥원 이름을 걸고 있는 국가이데올로기 억압장치다. 그러나 그들은 김수영의 말대로 그림자도 없다. 국가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은 채 작가들을 통제하고 있다. 깜냥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으로 작가들을 낚고 있다. 그러먼서 원고를 내라고 한다. 지원해 줄 테니... 그러니 어떻겠는가 어떤 미친놈이 바보같이 어렵고 진지하고 학술적인 수준 높은 책을 쓰것는가. 그러니 달달한 인문서가, 쓰레기같은 시, 소설, 에세이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요는 정부의 문화정책이다.
고매한 비평가께서는 왜 이런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대중 탓을 하고 시장 탓을 하는가. 사회를 이끌어야 할 비평가의 지도적 책임이 실로 막중하다. 답하라!
늘샘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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