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눈꺼풀은 어디로 갔을까(5)/ 하재일

썰물이 되어 바다를 바라보면 개펄에 끝없이
나문재와 농게와 짱뚱어가 나와 있었다

하무뭇 승인 2022.05.25 13:01 의견 0

내가 살던 태안군 안면도 정당리 여수해 앞바다엔 갯벌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간척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 여수해 앞바다 솔섬과 진대섬 사이에 여인의 속살보다 결이 더 좋은 뻘땅이 있었다. 현재 여수해 앞 간석지 들판은 원래 바다였는데 간척 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진대섬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어릴 적 집 앞에서 밀물이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삼거리 길목에 위치해 있는 우리 집에 많이 모였다. 누군가 눈 밝은 아이 하나가 ‘야! 물 들어온다’ 하면은 멱을 감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바다를 향해 뛰어간 기억이 난다.

바닷가로 갈 때는 부엌 부뚜막에 있는 성냥곽에서 성냥골 몇 개와 화약이 묻어 있는 성냥갑 한 귀퉁이를 찢어 주머니에 감추고 갔다. 준비된 깡통을 가지고 가서 용해 이쪽저쪽 갈밭을 뒤져서 주로 까땅 그이(게의 사투리, 蟹 crab)나 능쟁이, 황색 집게발을 가진 농게(황발이)를 잡아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불쏘시개는 소나무 삭정이나 마른 갈대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손쉽게 모든 게 해결되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엔 바다에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헤엄, 해군헤엄(자유형), 송장헤엄(배영), 갈치헤엄 등 온갖 종류의 수영을 즐기다 싫증이 나면 원뚝(제방) 위로 올라가서 바다를 향해 뛰어내렸다. 형 동생 할 것 없이 발가벗고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다이빙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화가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그린 아이들이 손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림이 생각난다. 누가 오래 견디나 자맥질을 하고, 두 패로 갈라서 온몸에 개펄을 칠한 다음 뻘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 사고도 발생했다. 팀이 열세에 몰리게 되면 진펄 안에 작은 돌멩이를 넣어 위장한 다음 던지는 것이다. 이마에도 맞게 되고 개펄이 눈가에도 맞은 일이 있다. 그야말로 광란의 머드 축제다. 맞은 아이는 아파서 엉엉 울게 되고 실갱이가 벌어져 그날의 뻘싸움은 대충 끝이 나고 만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꼬리를 내릴 준비를 한다. 아이들은 아침에 끌고 나와 묶어놨던 소를 데리러 간다. 대개 나이 든 형은 바지게에 소 먹일 깔(꼴)을 베러 가고 어린 동생은 소나 염소를 데리러 간다. 이때 씩씩한 내 친구 동혁이는 가끔 소의 잔등에 올라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나는 엄두도 못낼 일을 그 친구는 운동신경이 매우 민첩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멱을 감고 노는 장소는 지금은 논이 되었지만 주로 여수해 앞 바다인 원뚝과 솔섬 사이의 장소였다. 물살이 세지 않았고 물도 별로 깊지 않았다. 건너편에 된둥(모래톱)이 발달해서 왕복하며 수영하기가 좋았다. 그때는 누가 수영을 잘하나 하는 척도는 맞은 편 된둥에 누가 몇 번 왕복했나를 가지고 따졌다. 3~4번 왕복하면 힘이 빠지고 숨을 몰아쉬게 된다. 이때쯤을 조심해야 한다. 몸에 힘이 빠졌을 때 어쩌다 바닷물을 한 모금 마시게 되면 주먹 한 방 맞은 권투 선수처럼 그로키 상태에 빠진다. 바닷물은 짠 물이 아니다. 한 모금 목에 울컥 넘어가면 엄청 쓴 맛으로 변한다. 그러면 바로 욕지기가 나오면서 얼굴색이 하얗게 변색되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멀리 미개에 있는 용해로 멱을 감으러 간 적이 있었다. 사실 미개나 조구널 근처에 한번 놀러 가려고 하면 큰맘 먹어야 가던 시절이었다. 수영하는 게 너무 재미가 있어서 약간 먼 된둥에 왕복하는 일에 도전을 했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바로 네 번째에 그만 쓴 바닷물을 마시고 말았다. 나는 호수 중간 지점에서 힘없이 맥주병이 되어 바닷물에 잠겼다 떴다 표류하고 있었다. 때마침 중학교에 다니던 덩치 큰 형이 건져 준 일이 있다. 그 일로 혼이 난 뒤부터 난 나의 수영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바다를 두려워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썰물이 되어 바다를 바라보면 개펄에 끝없이 나문재와 농게와 짱뚱어가 나와 있었다. 짱뚱어는 망둑엇과의 바닷물고기로 퉁방울눈이 특이한 형상이다. 몸의 길이는 18cm 정도이고 가늘며, 푸른빛을 띤 남색이고 흰색의 잔 점이 많다. 머리의 폭이 넓고 작은 눈이 머리 위 끝에 툭 삐져나왔는데 아래 눈시울이 잘 발달되어 감았다 떴다 할 수 있다. 안면암과 조구널 사이의 개펄에 있는 짱뚱어가 특히 몸집이 굵고 허공을 잘 날아다녔다. 개펄에서 놀다가 날랜 짱뚱어를 잡기도 많이 잡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절대 식용으로 쓰지는 않았다. 유년 시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안면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짱뚱어를 구워 먹으면 고추가 커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어린 아이들은 짱뚱어를 가까이 하는 것을 서로가 금기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쪽 어디에 짱뚱어탕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무척 기이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맛이 있어도 유년기 추억으로 인해 나는 께름칙하여 짱뚱어탕은 절대 먹지 못할 것 같다. 개펄에 납작 엎드려 퉁방울눈이 귀여운 짱뚱어나 황색 집게발을 높이 든 농게와 함께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엊그제만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에서도 김 양식을 하게 되었다. 여수해 앞 간석지 들판이 원래 바다였고, 바다가 썰물이 되면 진대섬 건너 작은여수 큰여수까지 바닷물이 밀려났다. 이때 바닷물과 개펄이 맞닿은 경계선에 일정한 거리로 말짱(말뚝)을 박고 한 뼘 간격으로 짜넣은 대나무발(竹簾)을 수평으로 수십 미터 펼쳐 놓으면 김 포자가 달라붙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시간이 지나면 대나무 발에 붙은 김(海苔)이 사람 머리카락 모양 자라게 되는데 사리 때가 되어 물이 많이 쓰면 사람이 가서 긴 가위로 자른다. 한 사리가 지나면 다시 김은 흑운(黑雲)같은 머리카락이 더 길게 자란다. 가위로 자른 김은 다시 작은 대바구니를 거쳐 함지박에 옮겨지고 다시 김을 담는 부게(대나무로 엮어 등에 지는 함지박)에 담아서 등짐으로 지고 그 먼 여수(여우 섬)에서 지고 나오는 것이다. 김을 채취하고 시간이 남으면 울맛이나 피조개, 끝이 뾰족한 삽 모양의 가래로 낙지를 잡았다. 우리 아버지나 마을 어른들이 김을 채취하러 갈 때는 꼭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셨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부게에 김을 한 짐 지고 귀가하는 일은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 오후나 다음 날 아침부터 동네 공동 우물가에 나가 부엌칼로 잘게 다진 김을 다시 대나무로 짠 용수에 넣고 민물로 깨끗하게 헹구어 준다. 깨끗하게 여러 번 헹군 김은 어머니와 누이 또는 품 팔러 온 동네 아가씨의 손을 다시 거쳐야 한다. 민물로 채운 넓은 고무다라에서 김발에 한 장 한 장 손으로 네모진 틀에 적당량을 넣고 뜨는 것이다. 발장이 어느 정도 모아지면 물기를 빠지게 한 후에 사내애들이 대못이 박혀 있는 건장(乾場)에 다시 한 장씩 꽂아서 햇볕에 말린다. 우리 동네 여수해 뿐만 아니라 중장 2리 나배나 고남 대야도의 당시 풍경을 보면 마을마다 양지 바른 곳에 짚으로 엮어 만든 김 말리는 장석이 널려 있었다. 김 양식을 하면서 서서히 우리 집이나 안면도는 경제적으로 힘을 펴기 시작했다. 김은 날씨가 추울수록 잘 자라고, 날씨가 포근하면 병에 많이 걸린다. 바다의 수온이 상승하면 김 대신 값이 떨어지는 시퍼런 파래가 많이 붙어 김농사는 낭패를 본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잔잔하면 해우(김)를 건조하기가 좋았지만 겨울 날씨는 항상 힘든 날이 많았다. 바람도 많이 불었고 눈이 자주 내렸다. 바람이 한번 불면 장석에 세워 놓은 건장이 쓰러지고 다 마른 김은 스스로 떨어져 온 하늘에 날아다녔다. 김발을 건장에 내다 꽂으랴 쓰러진 건장 일으켜 세워 놓으랴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한겨울이 되면 안방에도 건넌방에도 마루에도 부엌에도 그야말로 온 천지가 새까만 김뿐이었다. 반찬도 굴 넣고 끓인 김국 또는 식초를 넣고 물회처럼 무친 김무침, 기름에 볶은 김부스러기, 들기름에 바른 김쌈 등 온통 김에 파묻힌 기억뿐이다. 겨우내 김 말리는 일을 하는 동안 손과 귀가 너무 시려워 짧은 겨울 햇살을 찾아 장석 한 모퉁이에서 볕을 쬐던 일이 생생하다. 조금이나 무시 때가 되면 김 건조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시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특히, 김은 처음 채취하는 초사리 김이 품질이 좋은데 우리 어머니께서는 꼭 한두 톳 챙겨서 절에 불공드리러 가실 때 챙겨 가지고 가셨다. 내가 대학 다닐 때 <詩論>을 강의해 주셨던 은사님께 소포로 김 두 톳을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바로 엽서로 답신을 주셨는데 사모님께서 평생 이렇게 좋은 김은 처음 봤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다. 초사리 김은 이제 막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명주실같이 반짝거리며 향기롭고 입에 넣고 씹으면 사르르 아이스크림 녹는 듯하여 감칠맛이 난다. 이제 손으로 직접 뜬 그런 수제품 해우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그때 김 뜨는 경지가 정말 달인의 수준에 있었던 사촌누이가 생각난다.

그 시절 변변한 방한복이나 장갑도 없이 장화 신고 바람 거칠게 부는 바다에서 김을 채취하는 일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날씨가 포근하면 김농사를 망친다 하니 마음 속으로는 몹시 춥기를 기원했다. 어머니들은 시루떡을 해다가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지내며 기원했으니 어찌 살아서 견딘 힘든 세월이었을까. 드디어 안면도 김은 특수를 맞이하기 시작했고 승언리 조구망터 사는 친구 임성혁의 증언에 의하면 장문 시장의 상권에도 김 생산이 영향을 미쳐 당시에 니나노 술집이 10여 곳이나 성업 중이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밀가루 막걸리 먹던 시절에 외지에서 돈 냄새 맡고 온 아가씨들과 함께 ‘신흥집, 반도집’ 같은 니나노 색시집에서 밤새 상다리 두들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안면도 승언리 5일장은 육지에서 온 김 수집상들로 노상 붐볐다. 우리 집에도 가끔 광천 상인이 집으로 와서 김을 사갔다. 김이 많이 출하될 때에는 동네 어느 한 집을 정해 민박을 하면서 김을 다량으로 매입해 트럭에 싣고 가기도 했다. 매입한 김은 승언리 6구 독개에서 광천으로 가는 장배로 실어 날라 새우젓과 함께 광천 시장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깥 세상에 소문난 '광천 김'은 사실 대부분 품질 좋은 안면도 김이었다. 그러나 안면도에 다리가 놓여 육속화가 이루어지자 번성했던 광천 장은 날로 쇠락하여 지금은 옛 명성만을 그리워할 뿐이다. 당시 승언리 시장의 풍경을 보면 함석지붕이 연달아 이어진 여러 골목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무슨 무슨 상회가 많았다. 덕흥상회, 제일라사, 중앙무선, 용신 상회(포목점), 제일약방, 화성상회(지물포), 가의원(한약방), 한일상회(건어물) 가게 건너 사이사이로 자리한 신흥집, 제일옥, 푸줏간 등이 있었다. 5일 10일로 이어지는 오일장날이면 볼 수 있었던 고무신 때우는 사람, 쥐약과 이약 고무줄 파는 사람, 야채 팔러 나온 아낙네들, 돼지 새끼나 강아지 팔러 나온 사람, 병아리 팔러 나온 사람, 수확한 잡곡 팔러 나온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1984년 완공된 현대건설 서산 간석지 AB 지구 공사 이후 천수만의 생태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에 안면도 사람들에게 엄청난 수입원이었던 김양식이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완전히 사라졌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까지 안면도 김 가격은 100장 한 톳에 보통 3~4,000원에서 5,000원을 호가했으니 지금 가격과 비교해 봐도 당시에 대단한 수입원이었다. 서산 태안 홍성 보령 등 천수만에서 해태양식을 하던 2,000여 가구의 어민들은 현대건설과 힘겹게 협의한 결과, 지난 86년 '생물피해 및 어장피해' 보상명목으로 73억원의 보상금을 수용하고 일단 땡처리했다. 현재 김양식이 사라진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자연부락 단위로 바지락 양식을 하며 갯벌을 관리하고 있다. 안면암 앞바다에 물이 빠지면 들어나는 ‘상펄’에서 種貝(어린 조개)를 채취하여 다시 펄땅에 뿌려 다 자라나면 마을 공동 작업으로 조개를 캔다. 안면도 바지락 중 황도에서 나는 바지락이 굵고 맛이 좋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전국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는다고 하니 천수만이 주는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갠지스, 천수만/ 하재일 시인)

나의 갠지스, 천수만
안면암 조구널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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