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없이 피는 열매, 무화과/ 이현

꽃 없는 고통스런 삶의 끝에 맺는 열매

하재일 승인 2022.05.08 21:49 | 최종 수정 2022.05.22 19:58 의견 0

-향년 81세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생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 한 시대의 족적을 남길 만한 시인이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인정합니다. 이 글은 2013년 블로그에 썼던 그의 시에 대한 감상입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ㅡ꽃 없이 피는 열매, 그 절망의 美學

바람은 얼마나 더딘지- /바다는 얼마나 더디 흐르는지- /어둠의 날개야말로 얼마나 늦게 이루어지는지- : -에밀리 디킨슨, <바람은 얼마나 더딘지-> 中에서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쎄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김지하>

ㅡ無의 自覺, 그 새로운 삶의 門

나는 빈그릇이다. 이 거대한 영혼의 물길을 담을 때마다 깨어지는 모난 칼이다. 역시 변명으로 시작한다. 어쩌면 이 변명은 나에게 섬광같은 칼날을 들이 댄 산 자와 죽은 자들과의 고통스런 대면의 서장같은 것. 그래도 나는 對面하겠다. 나는 깨어져야 하는 빈그릇이므로.

이 시의 제목은 <無花果>이다. 말 그대로 꽃없이 맺는 열매. 이 시는 그 ‘無’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無’를 자각하는 과정이다. 정상적인 식물이라면 꽃이 있은 다음에 열매가 온다. 그러나 무화과는 그 꽃 없이 열매가 온다. 따라서 이 시의 讀法은 그 ‘꽃’과 ‘열매’ 속에 숨겨진 암유를 찾아내야 한다.

제1장면은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라는 나의 고백이다. 토해 본 적이 있는가. 고통스럽다. 속내장이 뒤틀리면서 자리를 바꾼다는 기분이 든다. 토하고 난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본다. 우스개소리 같지만 토할 때는 쭈그리고 바닥에 닿을 듯이 낮춘다. 그의 시선은 아래에서 위를 본다. 하지만 그 하늘은 ‘잿빛’이다. 잿빛은 죽음의 색깔이다. 그것마저 무화과 한 그루가 가려 버린다. ‘잿빛’과 가려진 하늘은 ‘없음’이다. 곧 ‘無’이다. 그가 고통 속에서 발견한 것은 ‘없음’의 세계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은, 하는 수 없이 감당하기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염원들, 그의 사상, 그의 마음의 無를 일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장 그로니에, [섬] 中에서

꽃이란 일반적으로 ‘화려함, 영화, 찬란함,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사물이다. 거기에는 상식적인 긍정성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 시의 그에게는 그러한 시절이 ‘없었’다. 그 화려한 인생의 시간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매하게도 이 구절은 그가 그런 시절을 바라고 있었다는 의미도 되고, 그가 선택한 삶이 그랬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든 그것은 고통의 傳言이다.

ㅡ밖으로 피는 꽃과 안에서 피는 꽃

제2장면은 친구가 등장한다. ‘꽃 없이 열매 맺는 게’,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무화과라고 위로한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그게 무화과 아닌가’의 반복이다. ‘그게(=그것이)’ 무화과의 반복, 그리고 ‘어떤가’라는 질문의 반복. 이 반복이 강한 울림을 가져온다. “너의 인생은 꽃의 화려한 시절은 없었어도 단단한 열매를 맺은 삶 아닌가” 하는 친구의 말이 반복된다.

꽃 없는 고통스런 삶의 끝에 맺는 열매. 그것이 너의 삶이 가진 위대함 아니겠느냐고 ‘無花果’의 내밀성이 나의 삶과 중첩되고 동일화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기형도의 시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위험한 家系, 1969>’ 씨앗은 열매의 중심이고 시작이다. 씨앗이 없이 맺는 열매가 없거니와 열매 없는 씨앗 또한 없다. 즉 씨앗과 열매는 시작과 끝이며, 다시 끝이며 시작인 동일한 사물의 양면이다.

이 두 시의 교착지점에 꽃이 있다. 공통적인 것은 둘 다 꽃들이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밖으로 드러난 외부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시절을 보낸 뒤에 성숙한 게 아니라, 성숙한 채로 화려한(김현)’ 삶이 무화과이다. 곧 ‘그의 삶=무화과’라는 등식. 이것을 우리는 ‘초월’이라 명명한다. 그는 고통이 누적된 삶의 끝에서 순식간에 열매로 비약한다. 그 열매 속에는 화려한 꽃이 있다. 여기서 그의 말을 잠시 빌려온다.

"시인이라는 것은 본래부터 가난한 이웃들의 저주받은 생의 한복판에 서서 그들과 똑같이 고통 받고 신음하며 또 그것을 표현하고, 그 고통과 신음의 원인들을 찾아 방황하고, 그 고통을 없애며 미래의 축복받은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그 꿈의 열매를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사함으로써 가난한 이웃들을 희망과 결합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김지하.

(이현/ 시인ㆍ문학평론가)

이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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